일본 패션시장을 도전하기 위한 노력은 오래 전부터 도전했던 일이었습니다.
세계를 무대로 패션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첫 무대로 반드시 진출해야만하는 곳, 일본은 그렇게 묘한 도전의식을 제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름도 없는, 무명씨에 해당하는 패션디자이너. 자타가 공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도 인정하기 쑥스러운 신인 패션디자이너로서 일본 무대에 진출하고자 도전장을 내밀었을 땐 앞에 놓인 장애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공부한 일본어는 아직 기초 일본어 수준이었고, 일본어 패션용어는 아직도 미숙지하고 부족한 상황. 더구나 아는 인맥이라고는 나리타공항 안내데스크 정도가 고작이었던 생면부지의 땅, 일본. 영화 러브레터의 주인공인 말한 '오겡키데스카'가 영화 제목으로만 알고 있었던 한국 패션디자이너.
한국의 초보 패션디자이너의 무모한 일본 패션시장 도전기는 그렇게 맨 땅에 헤딩하기로 시작되었습니다.
나의 패션디자인을 사줄 바이어를 찾기 위해 제가 가장 먼저 택한 일은 샘플과 포트폴리오를 들고 일본으로 직접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만들어 낸 샘플을 보면 그들의 생각도 저와 같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일본 의류 상인들의 기본적인 관행이나 체계를 모른 채 뛰어들었던 시기였습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탄 시각은 아침 10시경. 비행기로 2시간 정도 걸리는 일본 도쿄에 도착하고 나니 조금은 긴장되었습니다.
당시로선 일본어도 서툴렀기 때문에 과연 내가 일본 사람들과 상담을 잘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생겼던 게 사실입니다. 일본 사람들과 상담할 내용을 종이에 적어 일본어로 번역해 두었지만, 어느 새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달달 외우고 또 외웠지만 일본 나리타(成田)공항에 내리는 순간 모든 기억을 한국에 두고 온 것 같더군요.
공항에서 도쿄 시내로 들어오자 시간이 오후 2시쯤 되었습니다. 공항에서 스카이라이나를 타니 1시간 이내에 우에노(上野) 역으로 데려다주더군요.
우에노 역 앞에 아메요코..라는 재래시장엘 갔습니다.
일본 패션시장을 도전하려면 무엇보다도 그 나라의 시장 아주머니의 마음을 열어야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싶었습니다.
마침 월요일이라서 그런지 일본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낯선 이방인이 되어 버린 저는 커다란 샘플 가방 하나를 앞에 둔 채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참으로 막막했습니다.
도쿄(東京)에 오긴 왔지만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하며 어느 매장을 우선적으로 들어가서 상담해야 하는지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긴장을 한 탓인지 소화도 잘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힘이 빠지려는 다리에 다시 힘을 준 다음 일단 매장부터 찾아가기로 하고 걸음을 옮겼습니다. 제가 이 때 일본 여성에게 물어 물어서 처음에 찾아간 곳이 바로 시부야 거리였습니다.
서투른 일본어와 영어를 써 가며 일본 여성들에게 물어 본 결과 일본에서 요즘 가장 인기 있는 패션 상가는 ‘시부야 109’빌딩이라고 하더군요.
물론 시부야 근처에도 다른 의류 상가들이 굉장히 많았지만, 최고와 겨루겠다는 일념으로 최고의 상권을 찾아갔습니다.
시부야의 최고 상권으로 들어선 저는 처음 보는 디자인이 많아서 사진 찍기에도 바빴습니다. 그 바람에 의류 매장 사장으로 보이는 일본 남자와 약간의 실랑이까지 있었습니다. 디자인 참조용으로 했던 것인데, 미안한 일이었죠. ^^;
제일 위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자는 생각이었는데 막상 매장 앞에 서고 보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손님들이 북적대는 매장에 들어가 과연 그 매장 주인하고 상담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매장을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물건을 팔려는 사람보다 사러 온 손님을 중요시 여기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요.
일본까지 와서 잡상인 취급받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생기고 바쁜 매장 안의 사람들을 보며 그렇게 계속 시간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용기를 내기로 했습니다.
일단 일본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그냥 돌아간다는 건 아예 상상도 못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창피를 당하더라도 일단 부딪치고 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식으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6층에서 한참을 망설인 뒤에 손님이 가득 들어차 있는 한 매장부터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한 마디 말도 못 한 채 다시 나왔습니다.
들어가는 순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일본 여자 판매원들 때문에 할 말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샘플이 가득 든 가방을 든 제가 관광객처럼 보였던 모양입니다.
여자 판매원이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며 제 옆으로 다가오는 순간 “샘플을 보시라. 디자이너로서 거래를 하고싶다”라는 말이 나오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뒤돌아서 나와 버렸습니다.
두 번째 시도는 좀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들어갔습니다.
눈 딱 감고 들어가서 먼저 사장부터 찾았습니다. 사장과 말을 해야 가장 빠르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처음엔 제 말을 잘 못 알아듣던 판매원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더니 제게 다시 묻는 것이었습니다. 대강 뜻을 짐작해 보니 어디서 왔으며 누구인지 묻는 듯했습니다.
제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난 한국에서 온 사업가인데 여기 매장 사장님과 샘플에 대해 이야기할 게 있다. 그러니까 사장에게 연락해서 나오라고 해라.”
저는 서툰 일본어로 대강 이런 내용을 최대한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판매원들이 나름대로 알아듣기를 바랐습니다.
다행히 제 바람이 통했던 것일까요? 서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여자 판매원 두 명 가운데 오른쪽 한 명이 제게 다시 대답했습니다.
답답한 노릇이었습니다.
일본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겠는데 나오라는 사장은 안 나오고 자기네들끼리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제게 다시 뭐라고 하니…….
저는 가슴이 쿵쾅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긴장을 한 상태인데 가뜩이나 서투른 일어가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판매원들이 말하는 일어 가운데 알아들을 수 있는 말만 골라서 들었더니 사장은 여기 없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소리일까?
사장이 매장이 없다니? 제가 당황하여 가만히 있자 여자 판매원 가운데 왼쪽 여자가 일본인 특유의 영어로 제게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Our company no here! this shop only! company no!”
무슨 뜻일까? 매장이 본사가 아니라 회사가 어디 따로 있다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물어야할지 잘 기억이 나지 않더군요. 저도 어느 새 그들처럼 영어를 쓰기로 했습니다.
“Ok! understand. and where? your company where? tell me. ok? I telephone! ok?”
본사로 제가 전화를 걸겠다고 하는 걸 알아들은 모양입니다. 대략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순진한 일본 아가씨들은 허둥대더니 다시 회사 전화 번호를 찾아 제게 건넸습니다.
그들이 시부야 109 빌딩에 없다고 한 회사는 근처에 있었습니다.
저는 일단 그 회사를 가 보기로 하고 샘플 가방을 든 채 시부야 109 건물을 빠져 나왔습니다. 매장에서 나오기 전에 매장 판매원들을 통해 회사측과 통화를 한 것은 물론입니다.
회사측 영업 담당자라는 사람이 전화를 받더니 상담도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준 것입니다.
제 본래 의도는 업체의 사장을 만나 단번에 결판을 지으려고 했던 것이지만 자리에 없다는 사장을 빨리 찾아서 데려다 앉히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바이어를 찾아 출장을 온 제 목적도 한번에 여러 업체를 접근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기 때문에 한 회사의 담당자부터 만나고 가는 것도 그다지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대개 실무진들이 회사의 업무를 보기 때문입니다.
담당자와 만나기로 약속한 JR역에 도착한 뒤 기다리기를 30여 분. 금방 오겠다던 부장인가 하는 남자 직원은 한참 후에야 자전거를 타고 땀을 흘리며 나타났습니다.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오면 5분 걸릴 정도로 가깝지만 전화를 끊고 바로 나오려는데 갑자기 한국에서 전화가 오는 바람에 조금 늦었다고 하더군요.
‘한국에서 전화라니? 이미 거래를 하고 있다는 뜻인가?
조금 전 전화 통화를 할 때는 그런 얘기가 없었는데, 도대체 한국에서 온 전화는 무엇일까?’
저는 잠시 긴장감에 빠져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마중 나온 일본 의류 업체 부장이라는 사람을 믿기로 했습니다. 그 전부터 일본을 여행하면서 알게 된 바로는 일본 사람들의 경우 ‘손님’이라는 의미가 각별해서 손님을 특별히 대우한다는 점입니다. 일본인들은 손님이라는 뜻의 일본어 갸쿠(客) 앞에 ‘존경’을 의미하는 오(お)를 붙여 오갸쿠(お客)라고 하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 기존의 한국 거래처가 있는 일본 업체라면 저를 여기까지 불러들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아니야! 내가 약해져선 안 돼! 만약 이미 다른 한국 업체하고 거래 협의를 하는 중이라면 내 회사와 할 수 있게 만들면 되는 거야. 그게 내가 할 일이야! 어디 한번 부딪쳐 보자.’
담당 부장이 자신의 회사라며 안내한 건물로 올라갔습니다. 회사는 그 건물의 5층에 있었고, 엘리베이터도 4인이 들어가면 꽉 찰 만큼 작았습니다. 일본하고도 도쿄, 게다가 장사가 제일 잘 된다는 시부야 109 건물에 매장을 갖고 있을 정도의 회사라면 그 규모도 엄청나고 시설도 상당히 좋을 것이라는 제 우려(?)와는 달리 뜻밖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담당 부장이 안으로 들어가고 뒤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제 앞에는 제품을 수출할 때 쓰는 커다란 종이 박스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간신히 사람 하나 통과할 정도의 공간만 남겨 둔 곳을 지나 왼쪽으로 돌자 더 놀라운 풍경이 벌어졌습니다.
평수가 꽤 넓어 보이는 사무실 중앙은 제품으로 전부 쌓여 있었고,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사무실 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를 안내하던 담당 부장의 모습은 제품들 사이로 이미 어디론가 사라진 다음이었습니다.
저는 가뜩이나 무거운 샘플 가방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뒤로도 꼼짝달싹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잠시 후 제가 못 따라오고 있는 걸 알았는지 담당 부장이 제품들 사이의 좁은 통로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희한한 사무실 풍경이었습니다. 한국이라면 직원들 위주로 널찍한 사무 공간을 마련하고 창고나 기타 공간은 한 곳으로 치우치게 만들어 두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나 제가 방문한 이 사무실은 사무실 대부분의 공간을 창고로 사용하고, 회사 직원들은 창가 쪽으로 책상을 빽빽이 배열해서 전부 밖을 보고 앉은 상태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직원들이 전부 일은 안 하고 창 밖만 내다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담당 부장과 이야기를 하면서 상당한 가능성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회사가 당신 회사랑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호언 장담을 한 뒤 일어서려는 찰나,
누군가 사무실 안으로 그 좁은 통로를 비집고 들어오는 게 보였습니다. 나이는 40대 중반 정도의 작은 체구를 가진 남자였습니다. 언뜻 보기에 거래처 사람 같아서 그냥 지나치려고 하는데, 담당 부장이 그를 향해서 인사를 하는 게 보였습니다.
저는 ‘사장’이라고 하는 단어를 들은 것 같아서 담당 부장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혹시 저 남자가 당신 사장님이냐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는 제가 그렇게 찾던 일본 의류 업체의 사장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제가 원했던 일이 이뤄졌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일은 다 된 거나 진배없다고 여겼습니다. 저는 뛰는 가슴을 간신히 억누르며 담당 부장에게 일본 사장을 소개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사장과 마주 앉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온 패션디자이너입니다. 이번 방문의 목적은 저희 회사와 협력하여 일본 패션 시장을 거머쥘 일본 의류 업체를 찾기 위함입니다. 이미 시부야 109 건물에 있는 매장은 들러 보았습니다. 저는 회사의 대표 디자이너로서 사장님의 회사와 거래하기를 원합니다. 어떻습니까?”
대강 이런 식으로 말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가 한 말은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저희 샘플을 일본에 팔려고 합니다. 위탁 생산도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그토록 자신만만해하며 일본에 건너왔는데, 막상 일본 의류 업체 사장을 만나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이거라니?
너무나도 형편없는 상담에 저 자신도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일은 다 틀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 좀더 당당하지 못할까? 왜 적극적으로 나를 알리고 비즈니스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도록 상담을 이끌지 못할까?’ 하는 자책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제 속을 들켜버린... 기운 빠져 어찌 못하고, 먹어주길 바라는 생선 신세였습니다.)
제 어깨는 일이 성사되든 안 되든 이미 기운이 축 빠져 버린 후였습니다. 그런데 일본 업체 사장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던 일본 사장은 빙그레 웃음을 짓더니 이런 말을 해 주었습니다.
“알았다. 당신 말은 충분히 알겠지만 우리도 의류 회사다. 의류 회사라고 하는 건 우리 물건을 매장에 내다가 파는 회사라는 점이다. 당신 디자인이 좋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도 충분히 의류를 만들 수 있는데, 내가 당신 디자인을 우리 매장에서 팔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리고 단가 면에서도 우리 회사보다 싸지 않다. 우리가 생산하는 것보다 당신 회사가 생산하는 가격이 비싸다. 비즈니스는 곤란할 것 같다.”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차라리 이 회사로 올 게 아니라 시부야 109 빌딩의 다른 업체를 찾는 게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억지라도 부려 보자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거래를 성사시켜야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직원들 볼 면목이 서지 않겠습니까? 일본 사장의 말을 잠자코 듣던 제가 다시 고개를 들고 웃으며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다. 난 한국의 최고 패션디자이너이고 당신은 일본 최고의 의류 업체다. 서로의 물건을 생산해 주거나 판매하는 일은 어려워도 같이 비즈니스하는 건 가능할 것이다. 가령 당신네 매장에서 우리 회사 디자인 상품을 끼워 팔 수도 있고, 우리 매장에서 당신 제품을 팔아 줄 수도 있다.”
한 발 양보한 이야기였지만 모두 진실은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 회사는 동대문에 작은 매장 하나만 운영하며 해외 상인들과 지방 상인들에게 주문에 의한 샘플 생산을 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물론 일본 업체의 제품을 팔겠다면 한국의 수많은 의류 매장을 돌아다니며 팔아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만 해 볼 뿐이었습니다.
일본 사장은 여전히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저를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습니다.
저도 일본 사장을 다시 쳐다봤습니다. 그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니까요.
저 자신이 그렇게 걱정스러웠는데 그 또한 왜 제가 걱정스럽지 않았겠습니까?
(이제 저는 적진에 와서 상대방에게 골라드십쇼! 하는 초밥 신세가 됐습니다.)
저는 다만 그의 걱정을 불식시켜야겠다는 자존심 하나로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일본 사장의 얼굴을 본 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저는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일어났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일이 성사되지 않자 실컷 신경질만 부리다가 일어서는 꼴이 아닌가 하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일본 사장이 뜻밖의 얘기를 했습니다.
“좋다. 당신이 우리 회사를 방문했으니 나도 한국에 있는 당신 회사를 방문하겠다. 당신 말처럼 같이 비즈니스할 기회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에 있는 당신 사무실에서 하자.”
긍정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좀처럼 지키지 못할 약속은 안 한다는 일본사람들에게서 사장이란 사람의 약속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부하 직원들이 옆에 있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결과야 어찌 됐든 일단 일본 사장의 입에서 긍정적인 말을 듣는 데 성공한 저로서는 어느 정도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훨씬 가볍게 느껴지는 샘플 가방을 들고 일본 의류 회사를 나섰습니다. 그리고 저의 발걸음도 첫 일본 출장을 무사하게 마친 탓에 한층 가벼워졌습니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 어느 날.
사무실로 저를 찾는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는 순간 대뜸 들리는 일본 남자의 목소리. 제가 일본까지 쫓아가서 상담했던 그 일본 사장이었습니다. 한국에 와 있으니 지금 자신의 사무실로 와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일본 사장이 한국에서 연락 사무소 형식으로 운영한다던 사무실이었습니다. 그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한국 사람들이 직원으로 있었고, 저를 일본 사장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같은 날 오후. 일본 사장은 저희 사무실로 왔고, 태국 등지의 매장에서 공동 판매 형식으로 제품을 판매하는 건에 대해 논의하기로 한 뒤 다시 돌아갔습니다. 제 일본 출장의 결과가 매듭지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일본사장은 일본 패션계의 성공인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일본 사장님이 한국에서 저를 만난 이후 제게 요청하기를, 자기랑 같이 일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회사에서 자기네 브랜드의 디자인을 하며.
그러나, 거절했습니다. 저도 자신의 브랜드로 세계 무대에 서고싶다는 뜻을 피력하면서 말이죠.
도쿄를 다녀온 저는 또 계획을 짜보았습니다.
이번엔 출장 지역이 오사카라는 게 첫 출장과 다를 뿐이었고 바이어 개척이라는 목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미 첫 출장에서 겪은 경험이 있던 저는 좀더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직접 일대 일로 상담하는 경우 손님이 많은 매장에서는 사장과 간단한 이야기조차 하기 힘들었고, 의류 매장에는 사장이 없을 때가 많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장이 자리에 없을 때는 제가 다시 사장을 쫓아 이동을 해야 한다는 점은 시간적으로 유리하지 않다는 게 제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바로, ‘전단지’였습니다.
제가 준비한 전단지란 거래 제안을 담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나마 당시에는 일본인에게 감수도 안 받은 채 제 나름대로 문구를 정하고 썼기 때문에 제대로 맞게 썼는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오사카는 같은 일본이라고 해도 우리 나라와 가깝기 때문에 비행기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립니다. 그리고 오사카에 가려면 먼저 칸사이(關西) 공항에 도착한 뒤 시내까지 1시간 가량을 가야 합니다.
오사카에 도착한 뒤 호텔에 짐을 풀고 다시 나왔습니다. 이번에 제가 갖고 온 것은 무거운 샘플이 아니라 A4 용지에 빽빽이 적은 거래 제안서류였습니다. 그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우리는 동대문시장 업체로 그 동안 일본 거래에 많은 경험이 있다. 따라서 한국을 방문하여 제품을 구매하거나 주문하는 일본 업체를 위해 아주 특별한 제안을 하려고 한다. 한국은 이미 잘 알다시피 패션 사업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만약 한국에서 의류를 생산하고 싶거나 구매하고 싶다면 우리 회사로 연락을 달라. 동대문시장 안내는 무료로 해 주고 우리가 제품 생산을 대행할 경우엔 1박 2일 호텔 숙식비와 왕복 비행기 항공권까지 무료로 제공하겠다. 단, 청바지 생산일 경우 오더량이 200장 이상일 조건이다)’
저는 누가 봐도 좋은 조건임에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700장만 복사를 해서 출장을 왔습니다. 물론 전단지와 함께 뿌릴 제 명함도 3통 분량, 600장 정도가 있었습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오사카 시내로 나와 난바(難波)로 향했습니다.
청바지 200장을 조건으로 한 이유는 원가 대비 우리 마진을 감안해서, 일본 바이어의 출장비를 대신내주겠다는 사례의 상징이었습니다. 첫거래는 우리가 마진 없이 하겠다는 표시였죠. (그러나, 결국 우리가 대신 출장비를 내준 바이어는 없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계산 하나만큼은 철저하더군요. 자기네에게 쓸 돈을 디자인 하는데 투자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자기에게 고마워하는 거라고.)
덧붙이자면, 최근 동대문업체들의 일본 거래 방식은 예전과 많이 다릅니다. 외상거래를 하는 분들이 많다는거죠. 심지어 3개월 여신으로 주고 거래하는 동대문업체도 있습니다. 저는 무조건 출고 전 결제 아니면 신용장 무역거래만 했습니다. 자금 여력도 문제이지만, 여신(나중에 돈을 받는)을 주면서 물건을 팔고싶진 않았죠.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패션 거리가 어딘지 이미 공항에서 확인해 두었거든요. 공항에서는 신사이바시, 신치 등의 장소를 알려 주었으나 차례차례로 둘러볼 생각으로 먼저 난바에 들렀습니다.
이번에는 첫 일본 출장과 달리 별 다른 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장사를 하고 있는 매장으로 찾아 들어가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손에 잔뜩 들고 있는 A4 용지 가운데 한 장을 건넵니다.
그리고 다시 인사를 하고 간단한 설명을 하거나 매장 주인이 바쁘다면 그냥 나오는 게 전부였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700장의 종이가 거의 떨어졌습니다.
오사카 시내를 몇 군데 다니지도 않았는데 벌써 1,000여 곳에 가까운 매장을 돌았던 것입니다. A4 용지가 다 떨어지고 마지막 한 장이 남았을 때는 갖고 간 제 명함을 나눠 주면서 설명만 하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두 번째 일본 출장은 2박 3일로 끝맺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전단지 방법은 앞서의 직접 상담에 비해 효과적이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건넨 종이를 매장 결정권자에게 제대로 건네 줬는지도 의문이었고, 누군가 최종적으로 제안서를 받더라도 종이만 보고 제게 연락을 해 오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안서를 나눠 준 업체의 의류 생산력이 다른 업체들에 비해 경쟁력을 갖고 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차피 제안서를 준비해서 나눠 준다고 해도 반드시 직접 상담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회사 경영 전략을 상대 경쟁 업체에게 노출시킬 뿐이라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제안서를 받은 일본 업체들 가운데에는 분명 한국 어느 회사와 거래를 하는 곳도 있었을 테니까요.
이 때도 운이 따랐던 모양입니다.
제 제안서를 본 일본 의류 도매상 가운데 한 업체에서 거래 문의를 해 왔습니다. 물론 그 다음 과정은 다시 제가 샘플을 들고 일본 오사카의 사장과 만나 제품에 대한 회의와 함께 진출 가능성 여부를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점점 물량이 늘어나더니 이젠 일본 거래처 중 최대의 거래처가 되었습니다.
***
이상으로 일본에서 바이어를 찾는 법에 대해 경험을 예로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일본에서 바이어를 찾는다는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보는 외국 상인과 선뜻 거래를 하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물건을 들고 왔어도 ‘신용’이 장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습니다.
여하튼 저는 운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일본 방문 첫 출장에서(물론 그 전에도 일본에 간 적은 있지만, 출장은 처음) 괜찮은 일본 업체를 찾았으니까요. 그 때 제게 물건을 팔아 주겠다고 약속한 일본 사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업체를 소개시켜 줬고, 소개를 받은 업체와 저는 일본 시장 진출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출장비를 알아볼까요? 사업을 하는 사람인지라, 놀러간 것이 아닌 이상 출장경비는 영수증 하나라도 챙겨와서 세금 처리를 했던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 출장갈 때 썼던 비용은 비행기 요금과 호텔 숙박비, 교통비를 포함하여 다음과 같습니다.
비행기 요금은 동경까지 보통 왕복 40여 만 원 내외로 일본 항공사가 한국 항공사보다는 몇 만원 정도 더 저렴합니다. 제 경험상 일본 항공사 가운데서도 ANA가 가장 싸더군요.
그리고 일본에서 체류할 때 쓰는 호텔 비용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저렴하게 잠을 자는 방법은 ‘캡슐텔’에서 자는 것입니다.
마치 성냥갑처럼 생긴 조그만 공간으로 구부리고 기어 들어가 잠을 자는데 그 작은 성냥갑같은 캡슐 안에 발쪽으로 텔레비전도 있고, 같은 건물 내엔 공동 샤워실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캡슐텔에서는 아침 식사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룻밤 잠자는 비용은 보통 3,300엔인데 한국 돈으로 35,000원 정도입니다.
(일본 동경 시내 식당)
그 외에 일본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비즈니스 호텔이 있습니다. 주의할 점은 비행기 비즈니스와 호텔 비즈니스는 그 차원이 달라서 일본 여행을 한두 번 다녀온 분들이라면 쉽게 알 것입니다.
일본에서 비즈니스 급 호텔이라 하면 침대 하나가 달랑 들어 있는 좁은 공간입니다. 캡슐텔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나마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일까요? 비즈니스 급 호텔은 근처 JR역에서 예약을 하는 방법과 직접 찾아가서 예약을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근처 JR역에서 예약을 하면 조금 더 쌀 것 같아 저도 이용해 봤는데 가격은 대개 1,000엔 가량 더 싸더군요. 보통 일본의 비즈니스 급 호텔이라 하면 7,500엔 정도 합니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는, 제가 거래하는 일본 사장들이 많아서 간혹 도쿄뿐만 아니라 오사카에 갈 때가 있습니다. 오사카에는 한국의 예전 대통령이 묵었던 호텔이라는데 그 호텔이 테이코쿠 호텔(帝國 HOTEL)입니다.
여기 하루 숙박비는 싱글 룸이 35,000엔 정도로 상당히 비싼 편입니다. 일본에서도 최고급 호텔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 호텔을 비싼 가격에 이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거래하는 일본 사장이 이 호텔의 멤버십이어서 회원 요금으로 제가 묵을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멤버십 요금은 이 호텔 요금의 1/3 수준으로 13,000엔입니다. 비즈니스 급이나 아파 호텔(APA HOTEL)보다는 비싼 호텔이지만 일본의 최고급 호텔을 1/3 가격으로 묵을 수 있다는 점에 가끔 들립니다.
식사는 시내 식당을 이용할 경우 보통 1,000엔 또는 2,000엔 안팎이지만 시내에서 조금 벗어나 길가 식당을 이용할 경우 500엔이면 해결할 수 있습니다. 혹시 햄버거 같은 식사도 괜찮다면 추천할 만합니다. 얼마 전에는 100엔짜리 햄버거도 파는 것 같았는데 저는 별로 내키지 않더군요.
교통 수단은 복잡한 도로 사정 때문에 주로 지하철이나 JR을 이용했습니다. 지하철은 상대적으로 JR보다는 비싸지만 택시보다는 훨씬 저렴한 교통 수단입니다. 보통 지하철은 200엔 정도이고, JR은 160엔 정도로 두 교통 수단 모두 가는 거리마다 차등 금액이 적용됩니다.
어떻습니까?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해외 바이어를 찾는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류 비즈니스를 하는 이상 내 물건을 해외에 수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외국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한국에만 머물며 그 사람이 찾아 와 주기를 기다리는 것도 답답한 노릇입니다.
직접 찾아 나서는 것도 매력적인 도전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최근 우리나라는 어려워진 국내 경기에 세금 관리에 미숙한 사업자들로 인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습니다. 오프라인 매장 경기도 안 좋고, 온라인쇼핑몰들은 홍보력 부족에 자금력 부족으로 애로를 겪습니다. 이만저만한 어려운 시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시장은 넓습니다. 눈을 조금만 더 넓은 곳으로 보시면 어떤가요? 소비자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왜 내게 안 오는지 고민하고 광고비만 탓할게 아니라...
가령, 물고기를 잡던 곳은 근해에서 벗어나 태평양, 대서양으로 나가볼 시기입니다. 내가 미처 모르던 곳에 엄청난 어군(漁群)을 발견하실지 모릅니다.
무역을 몰라서, 자금이 부족해서, 옷을 만들줄 몰라서, 언어가 안되서, 다른 나라 가서 장사하기 어려워서.. 문제점을 찾다보면 할 일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내용은 제가 직접 출장 가서 겪은 경험을 적은 사실의 기록입니다. 제가 가진 것은 중학교 때 배운 생활영어와 디자인 작업지시서와 샘플들, 그리고 출장경비로 준비한 64만원이 전부였습니다. 비행기 값 40만원과 숙박비 하루에 7만원 X 2일(14만원)에 식사 + 교통비 10만원이었죠. 한번은 돈이 아까워서 샘플은 지하철 코인락(300엔)에 넣어두고, 저는 동경 근처 요요기 공원에서 노숙을 하려고 했었는데, 모기가 극성인지라 하지 않았던 적도 있습니다.
출장의 덤이라면, 근처 하라쥬쿠 NHK 방송국 인근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젊은이들이 쏟아져나와 벼룩시장도 열고, 무명 예술인들의 음악공연도 펼쳐지는 등 볼거리도 풍부했습니다.
저는 그 이후, 일본 다이에그룹 계열 전국 매장 JJOINT에 디자인을 수출하게끔 되었고, 일본 유수의 패션기업들과도 디자인 수출 및 거래관계를 트게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시절의 무모한(?) 도전이 현재의 디자인 수출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시장에 진입에 성공한 저는 곧 중국 대륙 땅을 넘보게 됩니다.........
ps. 덧글을 보면, 직접 해보고 글 올리라는 분들이 많아서 직접 해본 경험을 올립니다. 이 글 보시는 모든 분들 기운내시고 용기 있게 항상 성공하셔요~ ^^
글, 사진 | 패션디자이너 Victor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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